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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 이야기

90' 광주 낭가파르밧 원정대

갈뫼 2021. 12. 16. 18:29

 

낭가파르밧 등반기

드디어 가는 것인가!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905월이 온 것이다.

돌아보면 2년여의 준비 기간이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휘파람처럼 지나가 버렸다.

88년 봄부터 시작된 낭가파르밧에 대한 그리움은 끊임없이 계속된 아침 훈련과 주말 산행, 힘겨운 지리산에서의 하계 훈련과 설악산, 한라산 동계훈련을 오직 가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만으로 버텨내게 했다.

개인장비와 공동장비, 취사구, 막영구, 식량 등 3톤이나 되는 물품들은 이미 지난 3월 부산항에서 떠나 보냈으므로 지금쯤 인도양을 건너 파키스탄의 카라치 항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 지난 15일 선발대 3명이 행정처리를 위해 갔으니 이미 통관을 끝내고 이슬라바마드로 옮겨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파키스탄의 불안정한 정세가 외신을 타고 들려올 때면 혹시 못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었지만 이제 우린 간다.

90525일 오후 ‘90 광주 낭가파르밧 원정대대원 13명은 마중나온 가족들과 친구들, 선배, 후배 여러분의 기원과 염려를 뒤로 하고 광주를 출발, 서울에서 1박하고 2610시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너무 오랫동안의 그리움이어서일까! 여행에 대한 기대나 설레임보다는 오히려 착잡해지면서 약간의 불안이 피어 올랐다. 비행기는 동경-방콕-마닐라를 거쳐 27일 새벽 파키스탄의 카라치 공항에 내렸고, 다시 국내선을 타고 내리고 기다리고 또 타는데 무려 28시간이 걸린 것이다. 마중나온 세 대원과 가셔브룸 봉을 가기위해 먼저 와 있던 대전의 빛나는 원정대 대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로 향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여장을 풀고 짐을 재정리 포장하였다.

시골장처럼 금요일만 서는 주마바자르(금요시장)에서 마늘, 양파 등 양념류와 땅콩, 살구 등 건과일을 샀고, 가게에서 쌀, 석유를 사고 가스충전도 마쳤다. 선발대가 끝내 놨을 줄 알았던 통관이 현지의 카라치 내전 사태로 인해 안돼 있어서, 우리는 최소한의 등반장비와 식량만을 가지고 가는 것까지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며칠의 시간과 예상보다 많은 돈을 들여서 어렵게 찾아올 수 있었다. 관광성에 여러 행정적 수속과 경비를 내고 정부연락관을 배정 받은 것으로 출발 준비가 끝났다.

날씨가 건조하여 40oC가 넘는 햇볕에도 땀이 흐르지 않아 오히려 견디기가 더 쉬웠다. 이제 영하의 지역, 만년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63일 트럭과 버스에 짐과 대원이 타고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밤새 달렸다. 인더스강을 끼고,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곁으로 얼마인지도 모를 만큼 길게 난 길을 곡예하듯 잘도 달린다. 턱수염이 요란한 운전사는 20여 시간을 하품 한 번 하는 일없이 노래를 부르며 가고, 가끔 강도가 나오는 지역은 경찰이 동승하여 일정 지역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목적지 부나르 마을(고도 약 1,120m)에 도착, 그 곳에서 포터와 요리사 등 140여명을 고용하여 카라반을 시작했다. 포터 임금은 1,000루피(한화 약 35,000)인데 그 나라 물가 수준을 보면 대단한 돈이다. 직업을 갖고 있는 이도 드물고, 농사랍시고 지을 비옥한 땅도 없으니 그들에겐 원정대팀에게 받는 임금이 수입의 전부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 하려고 싸움이 나기도 하는데, 촌장의 중재로 각 부족 간 몇 명씩 할당하는게 보통이다.

할라라 다리를 건너 다운질 마을을 지나자 멀리 흰 베일을 쓴 낭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석회가 섞인 뿌연 흙탕물이고 집들은 나무를 쌓거나 돌과 흙으로 겨우 모양만 낸 토굴이었으며 사람들은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더럽고 냄새가 지독했다. 원정대를 보면 돈과 먹을 것을 달라고 손을 벌리고 사진 찍는 것조차 돈을 요구해서, 외딴 곳에서 사는 순수했을 사람들의 마음을 더럽혀 놓은 것이 우리들 원정대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해졌다.

처음 반바지로 출발했던 것이 조금씩 고도를 올리면서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카라반 4일째 길에 드문드문 잔설이 보이면서 고소증세를 호소하는 대원이 생겨났다.

포터들의 식사는 차이(홍차+우유 비슷한 차)와 밀가루로만 구워낸 짜빠티 뿐이다. 날만 새면 출발을 하고 점심 때가 되면 더 이상 가려하지 않는다. 잠 또한 얇은 담요같은 것을 목에 두르고 다니다가 아무데서나 둘둘감고 누우면 그만이다.

반면에 우리는 꼭 쌀을 씻어 밥을 하고 국이나 찌개를 끓여야 하니 날마다 이동해야 하는 카라반 동안에 너무나 불편했다. 아무튼 9일에는 고도 4,200m인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여 낭가를 마주보게 되었다.

BC에는 폴란드-서독 합동대, 스페인대, 이탈리아-스위스 합동대, 유고슬라비아대, 불가리아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후에 일본대, 스페인대가 들어와서 BC는 마치 인종시장처럼 되었다.

우리는 때마침 내린 눈 속에서 대장텐트와 대원텐트를 비롯 식당텐트, 의료텐트 등 총 15동의 텐트를 치고 화장실, 목욕실 등도 만들었다. 날씨는 좋았고, 멀지만 바로 앞에 앉은듯 보이는 낭가도 제 모습을 다 드러낸 채, ‘어서 오세요반기는 모습이다.

며칠 뒤 5,200m 지점에 캠프1을 설치 텐트 4동을 쳤다. C1까지의 모레인 지대에는 군데군데 크레바스가 입을 벌리고 있고 조금씩 더워지는 날씨로 등반길은 날마다 달라졌다. C2로 가는 길은 60O의 계속되는 오르막과 마지막 200m의 수직암벽이 놓여 있어 가장 어려운 구간이다. 크다는 것은 얼마나 되어야 느낄 수 있는걸까! C1에서 보면 수직암벽은 설마 저렇게 가까이 있을까 할 만큼 바로 코 앞처럼 느껴지지만 겨우 몇 발자욱을 걷고 헉헉대야 하는 산소부족과 배낭 둘 공간도 없어 픽스로프를 잡고 볼일을 봐야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몇시간 걸어도 그 암벽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며칠을 오르내리는 노력의 결과, 암벽위 6,200m 지점에 텐트 2동을 칠 수 있었다.

BC에선 날마다 쨍쨍한 햇빛이 나도 C2이상에선 오후엔 언제나 안개가 끼고 눈발이 휘날렸다. 낮에는 덥고 해만 지면 영하로 떨어지는 급변하는 날씨 속에서도 대원들의 사기는 높았고 모두들 잘 먹고 건강했다. 고소에선 오랫동안 있지 못하기 때문에 3일 오르면 내려와 하루를 BC에서 쉬는데 BC4,000m가 넘는 곳이기 때문에 빨리 걸으면 질주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위에 올라가서는 윗 캠프에 장비나 식량을 옮겨 놓고 다시 아래 캠프로 내려와 자는데, 춥고 숨쉬기가 답답하여 가만 있어도 고소에 있다는 그 자체가 노동이다. 그즈음 스위스-이탈리아팀 2명이 등정에 성공하여 매우 부러웠다. 등반경험이 많은 이들이라 고소에 적응이 되어있어 날씨의 도움만 있으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 작년에는 많은 눈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올해는 스키를 준비하여 등반에 나섰었다. 우리가 철수하기 전까지 유일한 등정이었다.

6,800m지점에 C3를 설치한 후, 정상공격을 준비했다. 우리는 공격조와 지원조로 나누고 결전의 날에 날씨와 하느님이 도와주기만을 기도했다. 이때 폴란드-유고 합동대가 정상공격에 나섰다가 눈사태를 맞고 200m를 쓸려 내려갔다가 하루가 지난 뒤, 생환한 사고가 있어 눈사태가 더욱 심해진 것이 걱정되었다.

BC에서 휴식하고 하루 먼저 출발한 지원조는 정상공격에 필요한 C4건설용 텐트와 간단한 식량, 차 등을 가지고 출발하고, 다음날 공격조가 출발하였다.

72일 공격조는 C4를 칠 텐트가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여 비박을 하기로 했다. 몇 시간 걸려 눈구덩이를 파고 세 대원은 겨우 윗몸만 넣고 새우잠을 청했다.

이튿날 BC에서 정상을 향해 움직이는 세 점을 7,700m 지점에서 망원카메라로 찾아냈다. 불가리아팀 2명과 우리 대원 1명이었는데 너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불안했으나, 무전기를 통해 힘차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믿기로 했다. 그러다 정오쯤 힘들다는 목소리에 하산을 결정, 천천히 내려오던 소중한 까만점이 어느 순간 망원카메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곤 오후 늦게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오던 불가리아 대원으로부터 낭떠러지 아래 설원에 우리 대원 것으로 보이는 피켈과 배낭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전 대원이 BC로 철수하여 슬픔을 안고 기다렸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그리하여 못다간 그 길을, 하늘로 이어진 그 길을 우리가 갈 수 있기를......

그러나 7월 중순이면 온다는 몬순의 시작인지, 계속 안개가 끼고, 눈보라가 치는 악천후가 닥쳤다. 날마다 몇 번씩 떨어져 익숙해진 눈사태도 더욱 심해져 4Km떨어진 곳에서의 눈사태가 눈폭풍을 몰고와 BC의 텐트를 찢어 놓기도 했다. 정상공격에 나섰던 일본팀은 정상을 겨우 100m 남기고 심한 동상으로 돌아서야 했는데, 나중에 동경 나리따공항에서 들은 소식은 손가락을 잘랐다 한다. 2차례의 재시도에도 결국 낭가는 가슴을 열어주지 않았고, 우리는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갔던 그 길을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 나와야 했다.

 

귀국 며칠 후, 우리는 그 대원이 늘 안겨 살았던 무등산 아래에 추모비를 세워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오르고자 했던 그를 기렸다.

 

파키스탄에 대하여

 

파키스탄은 한반도의 3배가 넘는 면적으로 서쪽으로는 이란, 아프카니스탄을 북쪽으로는 힌두쿠시, 카라코람의 양 산맥을 사이에 두고 소련, 중국과 동으로는 인도와 접하고, 남으로는 아라비아해에 접해 있으며, 국토 중앙은 인더스강이 흐르고 있다. 종교 분쟁으로 인도와 분리, 우루두어로 청정의(힌두교도가 없는) 나라라는 뜻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독립했다.

행정구역은 5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주마다 언어가 조금씩 다르다. 말은 주로 우루두어와 영어를 하고 펀잡어도 쓰는데 문맹률이 70%나 된다. 수도는 이슬라바마드로 계획도시인데, 녹지대가 많아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느낄 정도로 조용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우리가 본 그 외 도시는 정신이 빠질 정도로 시끄럽고 복잡하다. 특히 마차에서부터 벤츠까지 구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달리는 도로는 트럭이나 버스 등에 그림이며 구슬 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여 요란스럽다.

이슬람교가 국교로 교리가 곧 생활규범이며, 금요일이 휴일이어서 달력은 금요일부터 한 주가 시작된다. 음주는 법으로 금해서 남자들은 아이스크림 집에서 만나 얘기하고 담배는 피우는데 대마초를 많이 피우고 열 살 안팎의 꼬마들도 태연히 피운다.

코 밑이나 턱수염은 모두 기르는데 수염이 없으면 동성연애자로 본다. 결혼할 수 있는 13세부터는 남녀구별이 엄격해서 교제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집안끼리 중매결혼을 하는데 외국인에 대해선 예외여서, 외국여성에 대단히 친절하여 택시를 타고서 우리는 친구라면서 악수라도 하면 택시비를 안 받기도 한다.

여자들은 여행 중에라도 음식점에서 남자와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고 취업도 할 수 없는데 가난하여 꼭 돈을 벌어야 할 경우, 기독교로 개종하여야 일을 할 수 있다. 옷은 남녀 모두 전통의상을 입는데 여자는 도빠따라는 두건을 두르고 남자는 터번이나 모자를 쓴다.

주식은 짜빠티와 쌀에 야채를 곁들이는데 빈부차가 심하여 가난한 자는 1루피(한화 36원정도)하는 짜빠티 하나로 때우고 토굴에서 사는데, 부자들은 없는 자들의 1달 식비로 한끼를 먹으며 집 앞에는 사병까지 두고 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물가가 싸기 때문에 게으르고 일을 안한다. 특이한 것은 버스나 기차등을 탔을 때 돌도 안 지난 꼬마까지도 부모에게 뭘 사달라고 울고 보채거나 떠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경제 상태는 우리나라의 60년대 후반 정도로 그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어릴적 통 속에 가지고 다니는 아이스께끼와 길에서 사먹던 냉차맛을 떠올렸다.

1991년 홍일고 교지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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